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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뉴스앤조이] 유진벨과 그 후손들의 한국 사랑

유진벨 / 4542

유진 벨과 그 후손들의 한국 사랑

유진벨재단의 뿌리를 찾아서


[미주 뉴스앤조이 2007-05-04]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은 구한말에 미국의 남장로교에서 한국에 파송되었던 선교사이다. 유진 벨 선교사의 외증손인 스티브 린튼(Stephen W. Linton) 박사가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이후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이제 "유진 벨"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는 않다. 100여 년 전 유진 벨 선교사가 한국 땅에 들어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며 교육과 의료 사업을 벌인 이래, 그의 한국 사랑은 자손들에게 이어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유진 벨 가문의 한국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전해 준다.

유진 벨 선교사는 아내 로티 위더스픈(Lottie Witherspoon Bell, 1867-1901)과 함께 1895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에는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선교사들로서 1884년에 입국한 알렌(Horace N.Allen, 1858-1932)과 1885년에 입국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은 서울 정동을 중심으로 의료 및 교육 사업을 하면서 복음 전도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복을 피해 지역을 나누어 선교 활동을 벌였다. 전라도 선교는 미국의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 맡겨졌다. 이에 따라 유진 벨 선교사는 광주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와 광주 여러 곳에 교회들을 세우고 당시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채 도탄에 빠진 조선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유진 벨 선교사는 교육과 의료 사역에도 중점을 두어 목포에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웠고, 광주에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세웠고, 광주에 최초의 종합병원인 광주기독병원(현 제중병원)을 세웠다.

유진 벨 선교사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도중, 그의 아내 로티 위더스픈이 헨리와 샬롯 두 자녀를 낳고 1901년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선교 사역 초창기에 당한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유진 벨 선교사는 한국 땅에서 선교 사업을 계속해나갔다. 이때 2살이었던 막내 딸 샬롯 벨(Charlotte Bell)은 미국으로 보내져 성장기를 미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샬롯은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고, 선교를 위해 군산에 도착했던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 1891~1960)을 만난다. 윌리엄 린튼은 샬롯 벨과 결혼한 후 전주 기전여고, 전주 신흥고 등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미국의 남장로교는 교육과 의료 사역에 중점을 두었고 선교지 내정 간섭이나 문화 충돌은 적극 피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에는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미국의 북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그리 문제시하지 않았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1937년 윌리엄 린튼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강제 출국을 당하였고, 그가 교장으로 재직하였던 전주 신흥고를 비롯하여 미국 남장로교가 세운 학교들은 모두 폐교 조치를 당하였다.

해방이 되어 다시 한국을 찾은 윌리엄 린튼은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젊은 지도자 양성"이라고 생각하여 1956년 한남대학교(HNU)의 전신인 대전대학을 설립하였다. 미국 북장로교에 의해 평양에 세워졌던 숭실대학교가 남북 분단 이후 1954년 서울에 재건되면서 1971년에는 대전대학교와 숭실대학교가 통합되어 숭전대학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83년에는 한남대학교(HNU)와 숭실대학교로 다시 분리되었다. 한남대학교 외에도 윌리엄 린튼 목사 부부는 40여년의 사역 기간 동안 군산, 전주, 목포, 광주, 대전 등에 여러 학교를 세웠다.

유진 벨로부터 시작되어 윌리엄 린튼 가문으로 이어진 한국 선교의 사역은 윌리엄 린튼과 샬롯 린튼의 세째 아들인 휴 린튼(Hugh M. Linton, 1926-1984)이 이어 받았다. 휴 린튼은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가족이 강제 출국 당한 뒤에는 미국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휴 린튼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부인 로이스 린튼과 함께 한국의 선교사로 들어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선교 사역을 이어갔다.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부부는 전라남도 섬 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곳이 넘는 교회를 세우며 도시보다는 농촌과 간척지 사역에 집중하였다.

1960년대에는 전라남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나면서 결핵이 유행하자 휴 린튼의 아내 로이스 린튼은 순천 지역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게 된다. 결핵이 유행할 당시 린튼 가문의 세 자녀도 결핵에 걸렸었다고 한다. 로이스 린튼은 35년간 결핵 퇴치 사업을 벌이고 1994년에 은퇴하였다. 현재 스티브 린튼이 벌이고 있는 유진벨재단의 북한 결핵 퇴치 사업 지원이 그의 부모님들이 해왔던 사역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의 둘째 아들인 스티브 린튼과 막내 아들인 존 린튼은 자신들의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사역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에 유진벨재단을 설립하였다. 유진벨재단 이사장인 스티븐 린튼은 어린 시절을 전라남도 순천에서 보내며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남북한의 분단 현실의 아픔을 목도하였다. 특히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대회를 계기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서 "또 다른 한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스티브 린튼은 1989년에 "남북한 윤리 및 도덕 교과서"를 비교 연구해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콜럼비아대학의 한국학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스티브 린튼은 한때 북미 관계가 호전되었을 당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5년 동안 북한을 드나들면서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나 만나기도 했다.

유진벨재단이 설립된 1995년은 북한이 가뭄과 수해 등으로 극심한 고난을 받던 때였고, 이때부터 유진벨재단의 북한 돕기 사역은 시작되었다. 1997년 북한의 보건성으로부터 결핵 퇴치 공식 지원 요청을 받아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순천기독결핵재활원 내 해외사업부 소속으로 "유진 벨 프로젝트"가 출범하였다.

유진벨재단은 비영리단체로서 한국과 미국에 각각 독립된 재단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12년간 북한 동포를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을 펼쳐왔으며, 북한의 식량난을 돕기 위한 곡물 지원 사업을 비롯해 결핵 퇴치 운동, 의료 약품 및 장비 지원 등 보건&bull의료 사업에 힘써왔다. 현재 북한 면적 1/3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결핵 퇴치 사업을 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총 400억 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전달했다.

강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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