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언론속 유진벨

[월간조선]2010년 10월 말 방북했던 유진벨 재단 인세반 회장

유진벨 / 987

“북한엔 아직 시골문화가 있다”

“북한의 권력과 정치 이야기는 제발 묻지 마라”며 유진벨 재단 인세반(60ㆍ미국명 스테판 윈 린턴) 회장은 손을 저었다. “기자들은 요즘 북한이 어떻게 변했나, 김정일·김정은 부자에 대한 북한 주민의 반응 이외에 별로 알고 싶은 것이 없더라”고 했다.
  
사실 김(金) 부자 3대 세습이나 연평도 포격, 장마당 경제, 군부의 부패상 등 이런 얘기들 말고 기자의 구미를 당기는 북한 메뉴가 뭔지 모르겠다.
  
2010년 11월 24일 서울 서교동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기자에게 그는 질문의 가이드라인까지 그었다. 하지만 묻지 말라는 것을 더 묻고 싶은 것이 사람의 생리 아닌가. 자칫 잘못 물었다가 벌컥 화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조바심이 나긴 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이날 오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로부터 ‘민족화해상’을 수상했다.)
  
그러더니 지난 2010년 5월 11일부터 25일까지 북한을 방문했던 동영상 자료를 10분가량 틀어주었다. 결핵을 앓는 북한의 환자들에게 약을 전해주고 객담(喀痰)을 받아내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남쪽에서 보내준 약 상자를 안은 북한 어린이와 나이 든 환자들의 모습은 약간 겁에 질린 듯, 누선을 누르는 듯 미묘한 표정이었다. 
  
화면을 보고 있노라니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같은 핏줄이지만 연평도 포격으로 군인과 민간인이 죽고, 보란 듯 핵실험을 하는 북한에 구호와 자선이 유효할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뺨을 내주는 게 맞나? 변할 것 같지 않은 이들에게 ‘사랑의 왕진 가방’을 들고, ‘의료의 강’을 흘려보내는 일이 마땅한 일인가. 금강산에서도, 연평도에서도 민간인이 탄(彈)에 맞아 숨지는 이 마당에? 대가 없는 게 사랑이라지만….
  
유진벨 재단 관계자는 2010년 10월 26일부터 여드레 동안 북한을 다시 찾았다. 물론 인 회장도 같이 갔다. 지난해만 5월과 9월에 이은 세 번째 방북이었다. 평안남도 순천과 평안북도 정주ㆍ곽산 등지, 그리고 평양시 룡성과 남포 지역의 내성결핵센터와 결핵예방원 소아 병동을 찾았다. 지난 1995년부터 북한을 돕기 시작해 15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마흔다섯에서 예순이 됐다.
  
후원자를 위해 제작된 동영상에서 인 회장은, 햇살이 눈 부셔서인지 약간 찌푸린 얼굴로 “결핵병원을 찾아가는 길은 꼬불꼬불하고 험합니다. (그래도)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얼굴이 선(善)해 보였다.
  

내성이 생긴 결핵환자 치료에 집중
  
다제내성 결핵약을 받아 든 환자가 밝게 웃고 있다. 유진벨 재단은 1995년부터 북한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유진벨 재단은 2007년부터 여러 종류의 결핵치료약에 내성을 가진 환자를 돕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다제내성(茶劑耐性) 결핵(MDR-TB)’ 환자는 1차 결핵치료제 4가지 중 아소나이즈드와 리팜피신 등에 내성이 생겨 결핵이 재발한 환자들을 의미한다. 이 환자를 통해 전염된 결핵은 일반 결핵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다제내성 결핵으로 진행된다.
  
일반 결핵환자들은 1차 치료제를 6∼8개월 복용하면 완치된다. 하지만 다제내성 결핵환자들은 청각상실과 정신병 등 부작용을 감수하며 일반 결핵약보다 100배나 비싼 약을 2년6개월에서 3년 정도 먹어야 치료가 가능하다. 대략 환자 1명에게 500만원이 들어간다. 약값이 워낙 비싸 환자와 후원자의 ‘1대 1 결연’ 방식으로 지원 사업이 이뤄진다.
  
“몸속 결핵균 10마리 중 한 가지 약으로 ‘때려’ 9마리가 죽는다고 쳐요. 하지만 살아남은 한 놈의 균이 내성이 생겨요. 환자는 다 나은 줄 알지만, 몸속에 균이 숨어 있어요. 그럼 다른 약을 써야 하는데, 그래도 안 나으면 다제내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1단계에서 4가지 약을 동시에 ‘때려요’. 그 약에 (결핵균이) 안 죽으면 다른 약으로 죽게 말이죠.”
  
약으로 질병을 ‘때린다’는 표현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환자 관리가 기본입니다. 관리가 안되면 환자가 약을 중간에 끊게 되고, 이 약 저 약 쓰다 내성만 키워요. 내성 환자에게 감염된 이는 처음부터 내성결핵에 걸립니다. 아주 불행한 경우죠. 일반 결핵은 4가지 약을 처방해 4만~5만원 하는 치료약을 6~8개월 복용하면 낫지만, 다제내성으로 넘어가면 치료가 복잡해집니다. 약값이 100배나 비싸고 회복률도 60% 정도입니다. 이런 결핵환자를 빨리 발견해서 치료하는 것이 향후 의료비를 줄이는 길입니다.”
  
―일종의 통일비용으로 생각하라는 의미군요.
  
“통일이 돼야 하지만, 더뎌도 해야 돼요. 남북이 왕래하게 되면 결핵이 옮겨갈 수 있어요. 사실 중국 동북(東北) 쪽에 결핵이 엄청 많아요. 북한의 결핵도 그곳에서 넘어왔을 가능성도 있어요. 지금 결핵은 글로벌한, 국경 없는 병이에요.”
  
유진벨 재단은 1997년부터 10년간 25만명분의 결핵약을 꾸준히 북한에 전달해 왔다. 그러다 2007년부터 만성환자의 객담을 채취, 적합한 결핵약을 개별 처방해 지원하는 맞춤형 다제내성 결핵치료에 주력하고 있다. 2009년 300명에게 약을 전하다 2010년에는 약 600명으로 치료환자 수를 늘렸다. 그러나 재단의 경제적 상황으로 지금은 550명분의 약을 전달하고 있다. 
  
“결핵을 앓는 이들이 유진벨의 방문에 맞춰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어요. 하지만 예산 문제 때문에 다 받아줄 수 없어요. 그게 제일 가슴 아파요.”
  
다제내성 결핵약은 비싸지만 부작용이 많아 의료진의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가능하면 정치하고 벽을 쌓고 일해야 합니다”
  
3년간 다제내성 결핵약을 복용한 뒤 완쾌된 환자들이 종이학으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밝게 웃고 있다. 종이학은 서울외국인학교 학생들이 만들었다.

“사실, 우리가 비싸면서도 위험물을 주거든요. 다제내성 약을 함부로 나눠 먹으면 오히려 내성을 키우게 됩니다. 약이 독해도, 부작용이 심해도 지침서대로 꼼짝없이 먹을 수 있게 해야 낫습니다. 그러니 호되게 야단도 쳐야 해요. ‘권력이니 정치의 파도’가 어떠하든, 치료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데요.
  
“구토가 나올 수 있어요. 게워낸 약을 씻어서라도 다시 먹어야 합니다. 영구적으로 귀가 먹을 수 있고 정신줄을 놓을 수도 있어요. 약을 안 먹으면 정신이 다시 돌아오지만, 결핵은 치료하지 못하게 돼요. 약을 먹는 2~3년간은 정신병자가 되기도 합니다.”
  
부작용치고는 무시무시했다. 죽는 일도, 사는 일도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생애는 어찌 이리도 고단한가.
  
“북한 환자들이 지침서대로 잘 따르나요?”라며 그를 향해 약간 몸을 기울며 물었다.
  
“잘 따르는 이도, 편법을 쓰는 이도 있어요. 약에 무슨 마술이 씌워져 약 먹으면 곧 낫는다고 생각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죠. 다제내성 결핵약은 과거 부작용이 심해 포기한 약인데, 신약 개발이 되지 않아 쓰는 겁니다. (결핵)예방약이란 게 따로 없고, 그걸 먹어서 면역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골치 아픈 놈이죠.”
  
인세반 회장 역시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결핵을 두 번이나 앓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휴 린턴(1926~1984ㆍ한국명 ‘인휴’) 목사의 육 남매(그는 5남1녀 중 둘째다) 중 첫째(데이비드 린턴)와 셋째(제임스 린턴)도 그 ‘몹쓸’ 결핵을 앓았다. 그의 어머니 로이스 린턴 여사는 순천기독재활원과 요양소를 세우는 등 결핵퇴치에 헌신한 인물이다. 가족이 결핵과 투쟁한 사람들이다.
  
유진벨 재단은 한국에 파송된 유진벨 선교사의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그의 4대손인 인 회장에 의해 설립된 대북지원 단체다. 창립 초기에는 북한에 옥수수나 곡물을 제공했으나 1997년 북한 당국으로부터 결핵퇴치 지원 요청을 받은 이래 의료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북한 면적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결핵퇴치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후원자와 후원액은 어떤가요.
  
“최근에는 별로 좋지 않아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고 남북관계에 따라 들쑥날쑥합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약을 보내고 방문하는 일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한평생 만난 적도, 인척 관계도 아닌 후원자들 덕분에 꾸려가고 있어요. 갑자기 환자를 많이 받았다가 후원이 줄어들면 난감하지요. 우리는 그런 것까지 감안해 3년 계획을 세워 추진합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가능하면 정치하고 벽을 쌓고 일해야 합니다.”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후원 모금을 한다. 1년 중 절반은 한국, 나머지 절반은 미국과 해외에서 보낸다고 한다. 대개가 이곳저곳에서 ‘구걸’하며 시간을 보낸다. 2009년 후원인 명부를 보니, 국내 후원인 수가 해외보다 많았다. 해외 후원인도 대개가 우리 교포들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동포를 위해 주머니를 털고 있었다.
  
성공에는 아버지가 1000명
  

―환자들을 만날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드나요.
  
“정치 얘기는 안 하지만 대체로 가족 얘기는 많이 하죠. 사실 우리가 보는 북한은 몇 개의 특수한 상황 이외에는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남한이 북한의 속을 안 들여다봐서 신기하지, 거기도 비슷해요. 그런 면에서 유진벨 재단은 노멀(normal)합니다. 환자들은 죽기 살기로 찾아오는데, 정치적 상황을 캐내려 해선 곤란하죠. 민간이라는 신분이 무너지면 사업 전체가 무너집니다.”
  
하지만 꽁꽁 문을 잠근 북한의 실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렇게 꽁꽁 걸어 잠가 놓고, 뒤로는 남한 체제로 숨어 들어가 불만을 가진 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공작을 벌이는 게 북한이 아닌가. 
  
“제가 만난 한국인 중에는 큰 정치인도, 작은 정치인도 있어요. 북한과의 문제를 모두 체제나 권력과 연관시켜 버립니다. 스스로 외교관 내지 정치가, 안보전문가를 자처합니다. 유진벨 재단은 민간단체입니다. 통일의 일꾼이 아니에요. 죽어가는 환자에게 약을 주려 ‘치고받고’ 노력할 뿐이죠.”
  
―일종의 투쟁가시네요.
  
“적어도 정치투쟁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기자들의 관심사와는 다르죠. 오히려 그게 재밌어요. 정말로 (북한의) 촌놈 환자가 정치체제의 개선에 대해 뭘 알겠어요. 알아도 말 안 하겠지만 제게 뭘 묻겠어요.”
  
전북 전주와 순천에서 선교사로 사역(使役)한 휴 린턴의 둘째인 인 회장은 1950년 미국에서 태어난 뒤 네 살 때 순천에 거주하며 초등학교에 다녔다. 미국과 순천을 오가며 지내다 대전외국인학교에 다녔고 플로리다주립대를 2학년까지 다니다 연세대 철학과로 편입, 1977년 2월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철학 석사,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남전 당시에는 미8군에서 복무했다.
  
―철학 전공자로서 북한 사람을 대할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드나요?
  
“이데올로기를 떠나 20세기는 가장 야만스런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전통도, 종교도 버리고 자신이 자란 시골문화도 말살시켜 버렸습니다. 도시문화가 매스컴을 타면서 끈끈하고 순박한 시골문명을 완전히 점령해 버렸어요. 그런데 북한은 아직 시골문화가 있어요. 평양에서 차를 타고 청진까지 가는 데 사흘이 걸립니다. 사흘이면 미국을 횡단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한국은 지난 50년간 반만 년 닦아놓은 기초가 시골에서 서울로 옮겨졌습니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서울’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죠.”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북한이 더 전통사회에 가깝다. 한국이 인식하지 않으려는 부분이지만 북한의 지역사회 역시 그 나름 화젯거리가 있고 관심사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의 도시에 사는 이들은 합리적이지만 정은 좀 떨어지고, 시골사람들은 정이 있더라”고 했다.
  
―많은 한국 사람이 북한을 돕는 데 딜레마가 있어요. 돕고는 싶은데 믿을 수 없다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은 생전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북한을 어떻게 대하느냐. 민주주의 관점에서 대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을 주인으로 보는 입장이다. 인민을 억압하는 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경제제재를 할 때도 무조건 할 것이 아니라 학생 1만명을 우리한테 보내라, 그러면 먹여주고 공부시켜 주겠다, 이런 제안을 해야 한다. 김정일이 이런 조건에 응하면 우리가 돈을 써서 도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김정일 정권을 강화시키는 데 돈을 써서는 안 된다.”>
  
인 회장에게 황장엽 선생의 발언을 전하려는데, 그는 이렇게 말을 막았다.
  
“사실, 결핵환자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이고, 정치적 미끼로 약을 줬다가 다시 빼앗았다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는 민간역할을 넓히려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자, 난 결핵(을 치료) 하니까, 정치도 나한테 맡기시오’ 하면서 서울에서 비행기 탈 때는 민간인 신분인데, 내릴 때는 통일의 용사가 돼선 곤란하지요. 그건 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치도 나한테 맡기시오”
  
―과거 우리 정부의 대북지원이 숨은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미국에서 인도주의적 지원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어딘지 아세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나요? 정부가 하는 자선사업은 정치화가 될 수밖에 없어요. 정부가 나서면 정치가 개입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어요.”
  
―햇볕정책은 북한의 두꺼운 외투를 벗기려는 의도였지요.
  
“저는 한국시민이 아니고, 미국 정책을 비평하라면 하겠지만 한국에 온 손님입니다. 현대인들은 돈이면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아요. 돈이면 세상도,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돈이 필요하죠. 결핵약도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돈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요. 북한의 경우 돈이 필요하지만, 돈으로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확실히 인정해야 합니다.”
  
―북한이 변하고 있다고 느끼나요?
  
“사람은 때가 되면 변합니다. 안에서 변하는 것이 훨씬 더 깊이가 있어요. 한국의 민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워싱턴에 가보세요. 한국이 자기 때문에 민주국가가 됐다고 착각하는 정치인이 수두룩합니다. 영어속담 중에 ‘성공에는 아버지가 1000명’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들의 생각처럼 미국이 압력을 넣어 한국이 저절로 민주화가 된 게 아닙니다. 실제 그런 압력을 넣었다면 오히려 민주화가 지연됐을 겁니다. 한국인 스스로 민주화를 위해 싸워서 이룩해 낸 것입니다.”
  
“선교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세반 회장의 미국 이름은 스테판 린턴(Stephen Linton)이다. 린턴에서 딴 성(姓)이 ‘인’이고 스테판의 3음절을 줄여 ‘세반’이라 부른다. 막내인 연세대 의대 교수 인요한씨의 이름은 존 린턴(John Linton)이다.
  
여기서 그의 가계를 좀 들여다보자. 인 회장의 조부(祖父) 윌리엄 린턴(1891~1960ㆍ한국명 ‘인돈’)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2세대 선교사에 속하는 인물이다. 1세대 선교사인 그의 장인 유진벨(1868~1925) 목사, 그리고 그의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한국인을 사랑해 한국에 살며 복음을 전파해 왔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남성 인구 중 대학졸업자는 1%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선교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과 의과대학에서 상위과정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미국의 선교사 선발기준은 ‘우수한 성적, 강인하고 단련된 육체, 결점이 없는 성품, 미국 내 여느 지역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나 간호사 혹은 선생보다도 열정적인 헌신’이다. 뼈 묻을 각오 없이는 선교사가 될 수 없다.
  
윌리엄 린턴은 1912년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국에 왔다. 그가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미국 내에서 엘리트 집단에 속했을 게 분명하다. 호남신학대 차종순 교수(역사신학)의 조사에 따르면, 1892년부터 1983년까지 남장로교 선교사 407명이 한국에서 선교사역에 임했으나 그중 40여 명(선교사 본인ㆍ부인ㆍ자녀ㆍ친척)만이 한국 땅에 묻혔다고 한다. 
  
윌리엄 린턴은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9월 전북 군산에 도착, 군산과 전주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재직했다. 목사임직을 받은 후 1940년까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해 학교를 폐교하기도 했다. 광복 후 1946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1956년 대전대학교를 세우고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린턴 목사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셋째 휴 린턴과 넷째 드와이트 린턴(1927~2010ㆍ한국명 ‘인도아’)은 1954년부터 각각 순천과 광주에 정착,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휴 린턴의 둘째가 바로 인세반 회장이다. 인 회장의 말이다.
  
결핵의 家系
  
유진벨 선교사. 그는 ‘전남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1895년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돼 목포선교부와 광주선교부를 창설했다.

“할아버지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교사로 오셨어요. 당시 남장로교는 교회 개척에 집중했고 교육에 있어서는 대학교보다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사역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든 이가 읽을 수 있게 선교사역을 문맹퇴치에 뒀어요. 또 일본강점기는 교육도 교육이지만 한국인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돕는 역할도 중요했어요. 그래서 기술과목 교사로 오셨지요. 나중 안식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목사안수를 받았고, 아버지는 한국에 오기 전에 목사안수를 받았어요.”
  
1950년대 당시 호남지역 결핵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코딩턴(Herbert Codington)이 세운 광주기독병원이 있었다. 65개 병상은 언제나 결핵환자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순천이 수해(水害)를 당하자 도시는 마치 폭격을 맞은 것 같았다. 교회 대들보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다고 한다. 이후 순천지역에 결핵이 만연하게 됐다. 
  
이때 휴 린턴 부부는 부모를 잃거나 헤어진 고아 12명을 6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 데려다가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즈음, 린턴 부부는 가난한 결핵환자를 돌보기 위해 진료소를 운영했고 1963년 순천 외곽지역에 ‘기독진료소’를 마련, 결핵환자들을 격리 치료하기 시작했다. 인 회장의 말이다.
  
“홍수가 나고, 집 잃은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왔어요. 그들 중 결핵에 걸린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죠. 당시 광주기독병원엔 결핵환자들이 가득했어요. 순천에서 광주에 가려면 비포장 길을 한참이나 가야 하니 순천에도 진료소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세운 겁니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선교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멀리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할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부해 학교를 폐교했지만, 일본인이 미워서 한 게 아니라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한 것입니다. 너무 미화시켜선 곤란해요.”
  
“나는 청지기”
  
아버지 휴 린턴은 교회를 개척할 때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선교에 앞서 먼저 철저한 지역조사를 했는데, 인구와 가계의 규모, 아이들과 학생들의 학교, 생계 수단, 교통 상황, 다른 종교 등을 조사한 후 자립 가능성이 있는 곳을 선정했다. 교회를 세운 후 지원은 20% 이상 하지 않았다. 선교는 자선행위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처럼 북한에서 결핵퇴치 일을 할 때 원칙이 있나요?
  
“후원자의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국제기구나 제법 큰 NGO는 자기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후원자가 단체이름으로 후원하지만 우리는 후원자 이름으로 합니다. 항상 북한에 갈 때마다 약을 보내는 후원자의 목록을 함께 준비해 북한 의료진과 환자에게 전달해요. 지원하는 이가 단체가 아니라 후원자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큰 차이입니다. 유진벨은 후원자의 심부름, 수백 명의 정성에 움직이는 단체입니다.”
  
그는 스스로 “‘청지기’에 불과하다”며 한국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미국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뜨거워서 움직이는 사랑은 결국 쉽게 식습니다. 인간관계도 항상 후끈하지는 않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열성적인 종교단체나 사회단체는 두렵습니다. 식어 버리면 책임감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죠.”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남한을 미워하나요?
  
“인간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요. 미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게 인간입니다. 역사상 미국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이는 미국인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남북관계가 복잡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북한 내부에서) 남한에 대한 미움이 희석된 측면이 많아요. 1979년 북한에 처음 갔을 때 한 운전기사가 제게 엉뚱한 질문을 한 게 기억나요. ‘해가 평양에서 뜨면 남한에서도 뜨느냐’는 것이었어요. 황당했지만 은유적 표현이 아니었어요. 
  
“남한은 잘살지요?”
  

그리고 3~4년 전 북한을 찾았을 때, 또 다른 운전기사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남한은 잘살지요?’라고요. 순간 긴장했어요. 무슨 의도인지 몰랐거든요. ‘잘산다’고 답했더니, ‘남한의 GDP가 영국을 따라잡았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라고 되물어요. 30년 전 질문과 비교해 보세요. 이게 북한 내부의 변화입니다.”
  
―어떻게 하면 남북이 통일될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그는 컬럼비아대에서 ‘남북한 윤리 교과서 연구’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하버드대 한국연구소 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유교문화에서 두 사람이 만나면 위아래부터 따집니다. 형이냐, 동생이냐가 중요한 것은 일단 누가 권력의 중심이냐를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은 중심지가 없어요. 금융은 뉴욕, 정치는 워싱턴, 교육은 보스턴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필연적으로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아요. 개신교에서는 자신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누구에게 의탁해 신과 연결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한국을 보세요. 금융의 도시가 어딘가요? 행정의 수도, 교육과 문화의 수도는 어딘가요? 모두 서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가치관이 한쪽 중심으로 정리돼 버립니다. 결국엔 다른 한쪽이 정당성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민간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각 지자체가 독립된 사회구조라면 몰라도, 중심(중앙정부)이 지방을 정리해 주는 체제라면 곤란합니다. 한국은 민간이 너무 약합니다. 물론 민간이나 지역사회가 정치나 정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제한된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프랑스 혁명 이후 가족이나 종교단체, 지역사회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정부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NGO조차 과거엔 순수한 봉사자와 후원자가 뭉쳤지만, 지금은 NGO들도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말단 공무원’이 됐어요. 엄밀히 말해 민간이 아니죠. 말단 공무원으로 움직이는 조직과 사람이 신뢰를 구축할 수 있나요? 힘들어요.”
  
―유진벨도 정부지원을 받지 않나요?
  
“우리도 받지만 50%를 넘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남북관계에 따라 후원이 들쑥날쑥해도 유진벨은 문을 닫지 않습니다. 그만큼 민간의 기초가 탄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부에서 지원해 주면 좋죠. 그러나 정부에 얽매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엄청나게 유리한 점이죠. 북한과 상대하는 것에서도 유리합니다. 한 사람의 결핵환자를 돕는 데 3년이나 걸리는데 정부정책에 따라 돈이 나왔다, 안 나왔다 하면 곤란하죠. 유진벨은 절대 민간 영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민간을 가장해 정치하지 않아요. 북한 가서 한국 정부 욕 안 하고, 미국 정부도 욕 안 합니다. NGO가 북한 땅을 밟을 때 ‘남한 민족의 대표’ 자격으로 간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남북관계가 최대 위기에 봉착했어요. 전쟁 위협까지 나옵니다. 어떻게 북한을 도와야 합니까.
  
“대북 관계에서 진심 어린 사람들이 행하는 가장 큰 실수는 북한 사람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음식, 약, 옷 또는 보금자리보다도 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수년간 살며 일한 이방인으로서, 저는 한국의 부유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엔 아주 많은 엘리트, 풍족한 에너지, 넘치는 좋은 의도,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부족한 것, 특히 남한과 북한 사이에 가장 부족한 것은 신뢰입니다.
  
이는 돈으로 살 수도, 명석한 두뇌로 계획할 수도, 또는 좋은 의도로 획득할 수도 없습니다. 떡갈나무처럼 충분한 영양분과 물과 햇빛이 있을 때에만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조건만으론 불충분해요. 도토리가 커다란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립니다. 남북이 신뢰를 쌓는 것 역시 반드시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시간만 흐르길 기다리는 것으론 부족합니다. 서로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남북의 한국인이 공동의 선을 향해 함께 일할 때, 통일에 필수불가결한 신뢰가 자라날 것입니다.”

김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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